꽃바구니

2011. 1. 29. 23:55



설 연휴 때라 그런지, 퇴근 무렵의 사람들이 저마다 손에 선물 세트가 들려 있었다.
나도 받았지만, 내가 좋아하는 종류(식용유, 고급 햄 등)를 들고 가는 사람을 보니 부러웠다.
물론, 올해 내내 더 이상 치약을 살 필요가 없다는 건 정말 기쁘지만.

퍼뜩 작년 생각이 났다.

친구 생일파티 약속이 있었는데, 영웅이 형이 준비해준 꽃바구니를 가지러 가느라 너무 늦어져서
결국 친구들과의 모임엔 가지 못하고 집으로 갔었다.
들고 다니기 번거로울 정도로, 커다란 꽃바구니였다.

나는 원체 꽃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같은 생명이라 해도 동물에 비해 너무 조용한데다, 그 조용함에 젖어 물을 줘야 한다는 그 간단한 일조차도 매번 까먹기 일수였을 정도니까.
그러지만 당신은 꽃을 좋아했다. 식물이 딸보다 더 좋은가 싶을 정도로.

그래서 그 커다란 꽃바구니를 들고 가면서 내 마음이 얼마나 뿌듯했는지 모른다.
그날은 어버이날이었고, 버스 안에 있던 사람들 모두가 다 내 꽃바구니를 한번씩 쳐다보고 지나쳤다.
누구에게 선물할지는 너무나 뻔한 거였기에 괜스레 내가 으쓱했다.
내 애인이 준비한 거니 내가 좀 으쓱해하면 어때, 뭘- 하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집에 도착해서, 현관 앞에서 문을 열고 그 꽃바구니를 들고 들어가
거실에 앉아있는 당신에게 건네드렸었다.

당신은, 내가 생전에 이런 걸 다 받아볼 줄 몰랐다는 듯 기뻐했다.
물론 꽃값이 비싸다곤 하지만-
평생 실용적인 것만 좋아라 하고, 자기 위해선 한푼도 아끼던 양반이
그 별것아닌 사치품에 그리도 기뻐하면서 어쩔 줄 몰라하는 것을 보고
나는 정말 뿌듯했고, 준비해준 형에게도 감사했다.

'내가 이런 걸 다 받아보다니...'
'내년에 더 큰 거 해드릴게.'

평소에 예쁜 소리라곤 한마디도 못하던 내가 모처럼 기분 내서 그런 말도 했었더랬지.
너무 예쁘다며 안방에 장식해놓고, 내내 두고두고 신경썼었다, 당신은.

스쳐가며 이렇게 퍼뜩 생각이 난다.

통장 정리하다 튀어나온, 작년에 받았던 세뱃돈 봉투에 어색하게 당신이 그린 곡선 세 개의 웃는 얼굴.
스킨로션 떨어져 간다기에 가격 신경쓰지 말고 고르랬더니 결국 못 고르겠다 해서 적당히 내가 골라 세트 하나 사다드렸더니 TV 광고에서 본 것 같은데 너무 비싼 것 아니냐고, 고맙다 했었다. 뚜껑도 열어보지 못한 채로, 지금은 내 방으로 돌아와 버렸다.
당신이 내게 사다주었다가, 무늬가 너무 현란해서 차마 입을 데가 없어 돌려드렸던 치마. 결국 지금 내가 입고 있다.
작년 11월에 떼었던 주민등록등본.

다행이다.
남들이 부러워할 정도로 큰 꽃바구니 선물해서.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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