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 대륙을 만나다
제가, 얼마 전부터 모 백화점 상설 수영복 매장에서
잠시 연줄 타고 픽업되어 일을 하고 있답니다.
백화점이니만큼, 일단 일을 시작하기 전에 교육을 받게 되어 있어서
일 시작하기 3일쯤 전에 교육을 받으러 갔답니다.
그리고 같은 매장에서 일하게 될 거라며
S라는 언니를 소개받았지요.
교육 같이 받으라며 등 떠밀려져,
저는 그 날 종일 S 언니와 함께 다니게 되었습니다.
이 S 라는 언니는
작은 체구에 마른 몸, 조용하고 느린 말소리 등
여튼 조금 희미한 인상의 사람이었습니다.
[언니, 저한테 편하게 대해주셔도 되요. 말씀 편하게 하세요.] 라는 제 말에도
[아녜요, 제가 좀 낯을 가려서...친해지면 곧잘 수다 떠는데...] 라는 반응.
대체 어디부터 공략해야 하나(...) 따위의 생각을 하던 쌀.
어느 순간 이야기를 하고 있다 보니까
이 S 언니, 만화를 좋아하신다는 겁니다.
그럼 꺼리는 있겠구나 생각했죠.
쌀 / [어떤 만화 좋아하시는데요?]
S 언니 / [어...제가 순정은 잘 안 봐요. 의외로 소년만화 쪽 같은 거 잘 보고...]
쌀 /[헤에, 저도 그래요. 어떤 거 보세요?]
S 언니 /[나루토나,블리치같은 만화 아세요? 그런 거 좋아해요.]
뭔가 순간...
오호라.
...라는 생각이 들었지요.
둘 다 동인성 높은 작품들이니.
여튼 시꺼먼 속마음은 잠깐 숨겨두고 계속 대화를 이어갔습니다.
쌀 / [그렇구나. 둘 다 점프 계열이네요. 은혼 같은 것도 좋아하심 빌려드림 좋을텐데.
전권 다 갖고 있긴 한데, 원서라서...]
S 언니 / [와, 원서도 가지고 있어요? 대단하다.
아, 그러고보니 나도 원서로 가지고 있는 책 있어요.]
쌀 / [뭔데요?]
S 언니 / [글쎄, 유명한 게 아니라서 잘 모를텐데...]
쌀 / [엔지간한 거면 다 알아요. 제목이 뭔데요?]
S 언니 / [아, 그게...]
['그래비테이션'이라고...]
딱 걸렸어.
여기서 쌀은, 곧바로 두 손을 맞잡고 춤을 추는 대신
돌다리를 두들겨 보기로 했습니다.
쌀 / [그래비테이션이라...어? 그거 혹시 그...남자들끼리 연애하는...그런 거 아니예요?]
(*혹자는 이 부분을 '존나 가증스러운 사기' 라 했습니다.)
S 언니 / [어?;; 그...알아요? 그런 것도?;;;]
쌀 / [야오이라고 하던가요? 언니 동인녀세요?]
S 언니 / [아...뭐...그런가...;; 그런데 쌀양도 아나봐요. 혹시 본 적 있어요?]
긍정의 대답이 나옴과 동시에
쌀은 여전히 웃는 얼굴인 채로 평온하게 대답했습니다.
[존나 좋아해요. 목숨 바쳤어요.]
제가 그렇죠 뭘...
여튼 그렇게 되어서 그 뒤로,
'낯을 많이 가려서 친해지기 전까진 쉽게 이야기를 못 하는 S 언니' 와 저는
근 예닐곱 시간을 쉬지도 않고 떠들었습니다.(...)
그 대화 중에도 또 웃긴 일이 몇 번 있었지요.
이 언니가, 좋아한 지는 정말 오래 되었는데
주변에 친구 딱 한 명 빼곤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어서
정말이지 혼자만 좋아하고 살았던 거예요.
이런 분들을 통칭 '섬' 이라고 한답니다.
고립무원의 자급자족 시스템.(...)
한참 이야기하다 이런 이야기도 했지요.
S 언니 / [부끄럽지만, 나 실은 대학 들어가고 나서 늦바람 들어서 코믹월드도 다녔었어.
내가 너무 좋아하는 작가분이 계셔서, 그 분 거 책이랑 팬시 사러...]
(이제 반말)
쌀 / [아, 나도 지금도 부스 참가해요. 실은 지난 주말에 코믹 때문에 못 나왔던 거걸랑요.
이번 주말엔 X플이라는 행사고, 다음주엔 또 점프 홀릭이라는 행사에 지인 도우미 가고 해서요.]
S 언니 / [그렇구나. 너도 행사 나가는구나.]
쌀 / [그렇죠 뭐. 근데 언니가 좋아한다는 작가분이 누군데요?]
S 언니 / [하긴 유명한 분이니 너도 알지도 모르겠다.]
[카인님이라고...]
푸하하하하하하핫!!!!!!!!!!!!
정말 뿜었습니다.
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
당장에 카인 언니에게 전화해서 당신의 오랜 팬과 만나고 있다고 전해주고 싶을 정도였죠.
ㅜㅜ
이야기하던 시점에서, 다음주엔
카인 언니 신간이 나와서 거기 도우미 간다 했더니
이런 우연이 다 있냐면서 '나 카인님 너무 좋아♡' 를 연발하는 겁니다.
ㅜㅜ
뭐, 그렇게 즐거운 시간을 보냈지요.
다음에 만날 땐 S 언니가 아직 접해보지 못한 새로운 세계를 보여드리기로 하고.
만화만 봤지 소설을 못 보셨다더라고요.
그래서 쌀신관, S 언니의행복도를 좀 높여드릴까했죠.
그래서 지지난주에씨X새 피씨X 시즌 1을 빌려드렸습니다.
아 이 탁월한 선택...
예상대로 즐거워 어쩔 줄을 몰라하시더군요.
다 보셨다기에 시즌 2도 보시라고 빌려드렸고.
그 이후에, 엊그제 레코딩 날 만났던 K님과 치밍 언니에게 이 이야기를 했더니
치밍 언니 하시는 말씀이...
[야. 대뜸 고기부터 먹이면 어떡해?
미음부터 먹여야지.]
왜 이래요.
비록 섬이었지만, S 언니는 경력이 있다고요.
슬램 시절부터 야마네 아야노를 지켜보신 분이예요. ㅜㅜ
그래서 괜찮다고 했더니 치밍 언니가 이어서 말씀하시기를...
[야. 암만 그래도 좀 살살 시작해야지.
지금 이게 어떤 상황인지 알아?
봐.
어느 작은 섬이 있었어.
그 섬은 작고, 인구도 적었어.
나름 독자적인 문화도 있지만 전체적으로 협소했고,
자급자족하는지라 그냥저냥 살았어.
하지만 이 섬은 그냥 이게 행복인가보다 했어.
비교대상이 없었거든.
난 풍족한가보다, 하고.
그러다가 이 섬이 흘러흘러 우연히 어느 대륙하고 부딪친거야.
근데 그게중국대륙이었어.
인구 12억의 중국말야.
자. 이 섬이 과연 얼마나 쇼크를 받았을까?
이 중국대륙아.]
엄마 나 대륙 먹었어...
아놔 정말!!!!!
낄낄낄낄낄!!!!!!!!!!!!!!!!!
ㅜㅜ
그 이후엔 황제와 빈민에도 비유를 해주었지요.
[어느 굶주린 빈민이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았는데
그게 딱황제였던거야.
근데 거기다만한전석차려주면 그 빈민 체한다고!!!
엉?!! 알겠어?!!!]
하지만 이미 고기 먹여버렸는걸...
좀 있음 만한전석 원하게 될 걸?
ㅋㅋㅋㅋㅋㅋㅋㅋ
여튼 그렇게 알바처에서도 동지를 만나 희희낙락 하고 있습니다.
항상 매장을 돌며 관리를 맡은 SM (세컨드 매니져의 약자. 쳇...) 을 바라보며
아저씨 아방수라는 둥 포지션 구분하며 놀고 있지요.
;ㅅ;ㅅ;ㅅ;ㅅ;ㅅ;ㅅ;ㅅ;ㅅ;ㅅ;
심지어는 카인 언니 신간 나온다고 하니까
이번 코믹 올 생각도 진지하게 하고 있는 듯.
ㅜㅅㅜ
그러한 이야기였습니다.
꽤 오래 전의 이야기인데 이것도 상당한 뒷북 포스팅.
여튼 그럼 중국대륙 겸 황제(...)는 이만 자러 가도록 하겠습니다.
내일도 물옷 팔러.
아 진짜 왜 Y자골을 보여주며
'저 이 수영복 괜찮은가요?' 고 묻는 게딱지같은 근육의 구릿빛 남정네는 왜 안 오는걸까요.
이상은 병으로 죽었지요, 네...
;ㅅ;
그럼, 좋은 밤들 되시기를.
쟈하라독시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