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만화 리뷰

습지생태보고서

찹쌀공룡 2006. 3. 20. 08:25
 
 
 
벌써 재작년으로 넘어가버린 04년.
그 해 어느 계절인가에 쌀내미는 충격적인 책 한 권과 만났었습니다.
 
책 제목은'공룡 둘리에 대한 슬픈 오마주'
작자는 최규석님.
 
아기공룡 둘리.
호잇! 이라는 짧고 간단한 주문과 함께
온갖 즐거운 마법을 펼치던-
고길동씨 댁에 얹혀사는 구박데기 서민공룡 둘리.
 
저와 동갑이기도 한-
국내 만화 캐릭터로서는 최초로 주민등록번호까지 부여받은
간판스타, 둘리.
 
그 둘리가- '더 이상 명랑만화일 수 없는 세상' 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 책을 읽고 정말 많이 울었습니다.
가슴이 멍든 것처럼 아파서, 책 끌어안고 엉엉 울어버렸었습니다.
그 책에 대해서도 좀 더 많은 이야기를 하고 싶지만-
다음 기회로 미루도록 하겠습니다.
 
사실 그 작품은 한 컷 한 컷 리뷰를 해도 모자라니까요.
절대, 부족합니다.
 
(그저 위의 몇 줄은 그 작품의 작자이신 최규석님의,
비길 데 없는 멋진 작품을 조금이라도 더 그럴싸하게
전달하기 위해 끄적댄 것이라 이해해 주십시오.)
 
사실 지금 포스팅하려고 하는 것은 둘리 책이 아닌
다른 책입니다.
작년 가을에 나온 책이죠.
이름하야-
 
 
 
 
습지생태보고서.
 
 
자연과학적 생물학 보고서, 또는 식물도감이란 연상을 불러일으키기 쉬운 이 제목.
최규석님의 말씀을 빌자면
 
'리얼궁상만화'입니다.
 
 
 
 

 

 

 

사실 이 만화는 꽤 오래 전부터 호시탐탐 리뷰 하려고 노리고 있었습니다.

시신덴의 리뷰라던가 그랑죠 리뷰도 물론 하고 있지만-

제가 뭔가를 리뷰한다는 것은 보통

 

'혼자 보기(or 듣기) 정말 아까우니 제발 좀 보십시오!'

...라는 취지에서 하는 것이 많습니다.

 

습지생태보고서는 단편 형식의 짧은 이야기들을

모아놓은 책입니다.

 

그 중에서도 개인적으로 인상이 깊었던 두 편만을 골라

리뷰해보려 합니다.

 

먼저, #24 : '수박 된다'

 


 
 
전체적인 스토리의 주인공 중 한 명인 최군입니다.
습지생태보고서의 주인공 중 한 명이니만큼- 금전적으로는 빈약한 그.
 
어느 날, 그런 그에게 친구 한 명이 어떤 제의를 해 옵니다.
 
"이거 한 번 입어봐라."
 
그리고 그 착용에 이어질 제안에 대해 최군은 요지부동의 장학생다운 태도로
장문을 읊습니다.
 
"짧은 시간에 얻어지는 단편적 정보로
그 관계를 지속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결정하는 행위.
그리고 그 결정 자체가 목적이 되는 만남.
이거 너무 변태적이라고 생각되지 않냐?"

 
 
 
"그런 변태적인 공간에서 한 인격체를 앞에 두고 못생겼으면 후회하고
예쁘면 어떻게 잘 보여볼까 고민하고 있을 나를 보고 싶지 않다."
 
최군에게 드밀어진 친구의 제안은, 다름아닌 '소개팅' 이었습니다.
그야말로 딱 자른 거절이지만-
친구 또한 최군과 아는 사이여서인지 쉬이 굴하지 않습니다.
 
"예뻐, 걱정 마."
 
"그런 얘기가 아니잖아!"
 
"소개팅 한 번 하라는데 뭐가 그렇게 복잡해?"
 
"네가 너무 단순한 거얌마."
 
친구 또한 막무가내인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괜찮은 애로 해주겠다고 실컷 약속을 해놨는데-
펑크가 나버린 상황인거죠.
외양으로 사람 판단할 애가 아니니 안심하라면서
얻어먹은 밥값으로 협박하는 쪼잔+치밀함까지 드러냅니다.
 
하지만, 역시 최군은 그다지 나가고 싶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있는 집 자식들간의 만남으로 계획됐던 자리...내킬 리가 있냐?'
 
가장 큰 이유는, 사실 앞서 말했던 소개팅 문화 자체에 대한 거부감보다는
최군 자신이 스스로에 대해 알고 있기에
굳이 다른 부류의 사람들 앞에 나가, 열등감을 살 필요는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겉모습 안 본다면서 이런 건 왜 입으래?
호박에 줄 긋는다고 삼 대를 이어 온 빈티가..."
 
그리고 도리 없이 친구가 가져온 옷을 주섬주섬 꿰어입는 최군.

 
 
 
"어디로..."


 

 
 
"어디로 갔냐?"
 
 
 
 
 
 
 
 
 
 
 
 
 
 
 
 
 
 
 
 
 
 
 
 
 
 
 
 


 

 
 
 
"시동 걸어."
 
 
 
 
 
 
 
 
 
 
 
 
 
 
 
 
 
 
 
 
 
 
 
웃...
 
 
 
 
 
 
 
 
 
 
 
 
 
 
 
 
 
 
푸하하하하하!!!!!!!!!!!!!
 
 
 
최고- 최고다앗!!!
시동- 시동을 걸랍신다!!!!!
 
쌀내미, 정말 저 페이지를 펼쳐들고서
배가 아플 때까지 웃었더랩니다.
 
하아. 이 또한 존경하고 사랑해 마지않은 최규석님의 비길 데 없는 파워인게죠.
최군의 심상변화와 더불어 마지막 페이지에서의
날아간 빈티- 재구성된 얼굴.
 
...어눌한 제 글줄로는 도무지 표현이 안 됨이 아쉬울 따름입니다.
아쉬움은 도리없으니 접고, 하나 더.
 
#49 : '어둠 속에서'

 
 
 
"복순아, 밥 먹자."
 
잔반과 밥을 섞은 전형적인' 개밥그릇' 을 들고 온 주인의 손에
복순이라 불린 개는 젖을 빨리던 새끼들을 팽개쳐 버립니다.


 

 
 
그리고 주인에게 충실하게 애교를 부리는 모습.
 
"아이쿠 이 녀석. 밥이나 먹어. 허허허....
먹어야 새끼들 젖도 주지."
 
그런 상냥한 주인에게로 한껏 애정의 표현을 하는 복순이.
 
"알았다 알았어.
요즘 바빠서 잘 못 놀아줬더니 심심했구나. 허허."
 
말은 그리하면서도 매우 만족스러워하는 복순이의 주인아저씨.


 

 
 
"어머니, 꼭 그래야만 하셨는지요!"
 
한편, 장면은 바뀌어 복순이는 자신의 새끼들에게 추궁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갑자기 무슨 소리니?"
 
서럽게 눈물을 콜짝이고 있는 강아지 세 마리.
 
"밥은 두었다 드셔도 되지 않았겠습니까?"
 
제법 그럴싸하게 어른스러운 말투로 자신의 어머니에게 따지는 가운뎃놈.
 
"내가 밥 때문에 그랬겠니? 바깥 주인님이 오랜만에 오셨잖니."
 
주인에게 대하던 살가운 태도와는 짐짓 다르게
어머니다운 위엄을 보이며 타이르는 복순이.


 

 
 
"우리가 아무리 주인의 밥에 의존하여 연명하는 개이기는 하나,
젖을 빠는 소자들을 뿌리치고 달려나가 재롱을 피우시는 어머니의 모습.
과히 좋아보이지 않았습니다!
 
생각지도 못한 순간에 제 입에서 젖꼭지가 빠져 나갈 때의 서늘함은
오래도록 상처로 남을 것입니다."
 
진심과 눈물이 어린 제 새끼의 설움에-
 

 

 
 
잠시 입을 다문 복순이.
표정이 심상치가 않습니다.
 
".............."
 
 
 
 
 
"내가 너희들에게 아직 가르쳐주질 못했구나."


 

 
 
"세상에는 복날이라고 하는 게 있는데..."


 

 

 

 

 

 

 

 

 

...잠깐만요.

스크롤바 조금만 올려서, 화질 떨어지는 컷이나마

좀 다시 봐주시지 않겠습니까?

 

복순이의, 저 입에 다 담지 못할 수만가지 뜻을 품고 있는 표정을요.

 

 

 

 

 

 

 

 

 

 

 

 

 

 

 

 

 

 

 

 

 

 

 

 

 

 

 

극상이다아-

 

정말이지 도저히 모자라는 제 말로는 다 표현해낼 수가 없는 저 표정.

 

내가 좋아서 주인에게 재롱떠는 줄 아느냐.

내가 너희들 젖 물리는 것이 별 것 아니어서 홱 뿌리친 것 같더냐.

철없는 너희들이 그런 소리를 할 수도 있겠지만

내가 죽지 못해서, 살려고 하는 짓인데 너희들이 그걸 모르는구나.

인간이란 생물이 얼마나 마음을 손바닥 뒤집듯 잘 바꾸는지 모르는구나.

쓸모가 없다고 느껴지는 것에 대해서 어디까지 잔인해질 수 있는 것이 인간인지

너희들이 아직 겪어보질 못했구나.

우리와 인간의 관계에 대해서 너희들은 아직 모르는구나.

 

너희들이 아직 세상을 모르는구나.

 

...정도만 적어두겠습니다.

물론 이것은 제 개인적 감상입니다.

실제 최규석님의 의도와 좀 멀찍할수도 있는게지요.

 

이 짧은 4P로 이렇게까지 사람을 뒤집어놓을 수 있는

만화를 그리신 최규석님.

...사랑합니다.

 

전체 54편 중에서 두 편만 리뷰하면서도 아쉽습니다.

정말로 혼자 보기 아까우니 좀 보시라고 득득 권하고 싶어지는 만화입니다.

(물론, '그럼 스캔해서 돌려라' 같은 말씀을 하실-

혀를 잡아 세 치를 늘려놓고 싶어질만큼

저를 미소짓게 만드실 분은 여기까지만 보십시오.)

 
저는 사실 일본 만화쪽을 더 많이 보는 편이고-
국내 만화는 제가 아는 작가분과 주변의 추천에 의해 가끔 손대는 편이므로
상당히 그 폭이 좁습니다.
 
그리고 일본 만화계를 보고 있자면
역시 여러모로 부러운 점이 많습니다.
 
역시 가장 부러운 것은 상업적인 면에서겠지만-
편집부와의 단계적이고 치밀한 상의를 거치는 원고 과정이라던가-
작가가 자신의 저작권을 좀 더 확실하게 거머쥘 수 있는 점이라던가.
따지자면 좀 많습니다. 커트.
 
사실 상업적인 면에서는 한국만화가 일본만화에 비해
전체적으로 열등성을 띠고 있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이에 대한 수치적 데이터를 집계하며 조사하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어느 쪽이 더 팔리는가' 에 대해 생각한 결과입니다.)
 
하지만, 한국만화는 아직 그 맹위를 떨치지 못한 것이라고 저는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아직' 인 겁니다.
지금도, 한국만화계는 발전하기 위해 나아가고 있노라고-
저는 그리 믿습니다.
 
왜냐구요?
 
 
 
 
 
이런 만화가 있으니까요!
 
 
대한민국에는, 이런 만화가 있으니까요!
 
 
 
 
 
이 포스팅을 읽고 이 만화에 대해 관심이 생기셨다면-
한 번 읽어보고 싶다는 마음이 드셨다면 꼭 좀 사보시라고 권해드리고 싶군요.
 
최규석님의 홈페이지도 함께 소개하려 했으나
현재 닫혀 있더군요. 아이쿳.
 
대신이랄까, 제 친애하는 친구가 이전에 작성한
최규석님의 또 다른 작품집인 '공룡 둘리~' 쪽의 포스트를 소개합니다.
역시, 흥미가 있으시다면 한 번 읽어보시기를.
 
<http://blog.naver.com/sweetblack07/120022392529 >
 
 
짧게 두 편만 리뷰하겠다고 해놓고 벌써 새벽도 한중반이 되어버렸습니다.
이런, 레폿 써야 하는데.
하여간 애정이 죄이니- 저는 중범자입니다.
 
내일 또 시작될 즐거운 한 주를 기약하며 저는 이만.
그럼,쟈하라독시드.
 
 
 
 
 
*덧글.
 
저는 최규석님의 팬입니다.
그러나, 가장 일반적인 독자로서 접점은 그 분의 책 뿐입니다.
제 지인이라거나 하는 즐겁고 황송한 착각은 혹여라도 거둬주시기 바랍니다.